월성 양동마을 (2)

 

 

 

 

 

 

양동마을 향단은 이언적이 경상감사로 있을때 어머니의

병간호에 도움이 되도록 중종임금이 하사한 건물이 향단이다.

임금이 직접 지어준 집답게 양동마을에서 가장 견고하고 구조가 아름다운 가옥이다.

집의 구조는 좀처럼 볼수없는 구조인데 미로처럼 엉켜있는 가옥안을

빙빙 돌아가며 둘러보는 맛이 다르다.

이언적이 시조인 여강이씨의 종가집이기도 한 향단은 안채, 사랑채,

행랑채와 두개의 마당으로 이루어졌는데 마당은 안채 마당과

행랑채 마당으로 나누어져있다.  원래 행랑채쪽에도 문이 있었으나

그 문을 막아 대청마루가 있는 방향에서 집안으로 들어갈수 있는 구조가 되었다.

 

 

 

 

 

 

 

행랑채는 정면9칸 측면1칸 규모의 건물이며 방 문 마루 곳간등으로

이루어져있다.

행랑채 안쪽에 안채와 사랑채가 있고 두 건물 사이에

중정이 있는 구조이다.

중정 오른쪽 건물이 대청마루가 달려있는 사랑채인데, 현재 관광객이 이용하는

대문을 통과하면 계단위에 바로 대청마루가 있으며,

대청마루에 서면 양동마을이 훤히 내려보인다.

지금의 향단은 99칸중 50여칸이 남아 있는데 독특한 건물구조로 인해

조선중기 건물양식을 연구하는데 좋은 자료가 된다.

 

 

 

 

 

 

 

양동마을에 있는 조선시대 가옥 가운데 가장 흥미있게 관찰할수 있는 이집은

보물 제412호로 지정되어 있다.

이조판서를 지낸 우재 손증돈이 양동마을 초입의 언덕위에 세운 정자가 관가정이다.

건물의 형태는 전형적인 ㅁ자 형이며 안채, 사랑채, 누마루를 갖추고 있다.

건물안에 사각형의 마당이 있으며 대문쪽에 사랑채가 있고

누마루는 사랑채 왼쪽에 달려있다.

 

 

 

 

누마루에는 툇마루가 부속되어 있으며 누마루에서면 양동마을 입구에서 흐르는 논내 개울이

훤희 보이기 때문에 전망만큼은 양동마을에서 가장 뛰어나다.

안채는 마당 안쪽의 북쪽에 있는데 대청마루, 온돌방등이 있고 부엌은 안채와 떨어진 오른쪽에 자리잡고 있다,

조선 중기에 세워진 것으로 추정되는 이 양반집은 일각대문과 담장만이 1981년 보수할때

세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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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지역의 대표적인 민속마을인 월성 양동마을인 경주에서 16킬로 북쪽에 위치한

설창산 기슭에 자리 잡고 있다.

조선시대 상류층 양반들이 살던 이곳은 대체로 높은 지대에는

종가집들이 있고 낮은 평지에는 초가집들이 들어서있다.

한창 위세가 당당했을떄는 500여채의 집이 있었으나 지금은

133여채의 가옥만이 남아있다.

 

 

 

 

 

 

 

그 중 보물은 4점이고 중요민속지로는 13점, 경상북도 유형문화재는 5점이나 된다.

이곳에서 배출된 대표 인물로 성리학자 이언적과 청백리 손증돈이 있는데

이런 양동마을은 마을 구경보다는 국가보물로 지정된 3채의

양반집 구경이 재미나다.

보물 제411호인 무첨당은 양동마을의 안부 서북쪽에 있는 회재 이언적의 종가댁

별장에 해당하는 건물이다.

조선시대 성리학자인 이언적은 이곳 무첨당에서 태어나 숙부 손중돈에게 글을 배웠고

1514년에 문과 과거에 급제해 중앙정부에 진출하였다.

 

 

 

 

정2품의 이조 형조 예조 판서를 역임했으며 종1품의 의정부 우찬성과 좌찬성에까지 올라

최고 관직을 두루두루 섭렵한 이언적은 때떄로 벼슬을 마다하며 물러나기를 여러번 헀는데 몇번은 늙은 어머니를 봉양하기 위해서 였고 몇번은 자신의 병세가 심했기 때문임.

또한 여러차레 사건들에 연루되어 귀양을 가기도 했는데 대부분 그 이후 복권되었다.

 

 

 

 

 

무첨당은 일종의 별당채인데 외부에서 온 반가운손님을 맞이하거나 독서를 하는 장소로 사용되었다고 한다. 우측에 있는 살림집은 사랑채, 안채, 행랑채로 이루어진 ㅁ자형 건물인데

현재 거주한느 사람이 있다.

공개된 구간은 무첨당 일대이며 사당은 살림집 뒤편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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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림사사적기에 의하면 골굴사에는 열두개의 석굴이 있었다고 한다.

창건연대는 기림사와 같은 시기로 보이며 기림사를 창건한 광유성인 일행이 골굴사도 함께 창건한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창건 당시 골굴사는 인도의 사원 양식과 비슷한 석굴사원이었던 것으로 추정되는데

본존불은 응회암 재질의 암벽에 새겨졌고 그 그아래 쪽에는 12처의 석굴을 판뒤 석굴의 전면에 목조 기와집을 세운 모습이었다.

 

 

 

 

조선중기의 화가 겸재 정선의 골굴 석굴도에 골굴사가 등장하는데

그림에도 기와지방으 있는 석굴이 표현되어 있다.

정시한의 토함산 산중일기에는 골굴암의 모습이 목조 기와집 형태의 전실이 있었고

전실을 연결하는 회랑이 있었다라고 묘사되어 있다.

 

 

 

이를 증명하듯 18세기 중엽에 발간된 경주부 지도에는 골굴이라고 표기된 곳에

8개의 목조 암자들을 그려 놓았다.

석굴마다 전실로 세웠던 이 목조 기와집은 조선후기에 일어난 화재사건으로 전부

소실되었다.

지금의 석굴들은 전실 없이 바위 석굴만 남은 상태인데

관음전 만큼은 전실을 갖춘 훌륭한 석굴법당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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