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흥왕과 이차돈의 순교

 

 

 

 

 

 

 

 

 

신라 제19대 왕인 눌지왕때 고구려의 묵호자가 신라땅 일선군에 나타나자 일선군 사람 모례가 묵호자를 몰래 모셨다. 마침 양나라에서 사신이 들어와 눌지왕에게 의복과 향을 건네주니 왕은 향의 용도를 알지 못했다. 수소문 끝에 묵호자를 통해 향의 용도를 알게되었다.

딸의 병이 치유되자 왕은 매우 기뻐하여 묵호자에게 금은보화를 주어 사례하였다.

 

 

 

 

 

묵호자는 왕에게 받은 금은보화를 모례에게 주고 갈 곳이 있다며 행방을 감추었다.

비처왕 시절, 아도화상이라는 사람이 세사람을 데리고 모례의 집을 찾아왔는데

아도화상의 모습은 묵호지와 비슷했다.

아도화상은 모례의 집에서 살다가 죽었는데 그가 데려온 세 사람이 계속 머물며 불경을 전파하니 점차 불교를 믿는 사람들이 생겨났다.

법흥왕 시절 왕은 불교를 정식으로 공인하려고 했으나 신하들의 반대가 심했다.  

 

 

 

 

 

법흥왕은 형리에게 명하여 이차돈을 참수토록하였다.

이차돈이 말했다

"나는 불법을 위해 죽는다. 만일 불법이 신성하다면 내가 죽고 난뒤 반드시 예사롭지 않은

일이 생길 것이다."

형리가 이차돈을 참수하자 목을 벤곳에서 피가 울컥울컥 솟아올랐다.

그런데 그피는 젗빛처럼 하얀 색이었다.

그전에 없었던 일이 목격되자 신하들은 더 이상 불법을 비방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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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인문 묘

나의 일상 2013. 12. 9. 16:54
김인문 묘

 

 

 

 

 

 

 

 

무열왕릉 입구 도로변에 위치한 2기의 묘 가운데 1기가 무열왕의 차남이자 문무왕의 동생인 김인문의 묘이다.

23세의 나이로 당나라에 숙위차 들어간 김인문은 후에 당나라에서 벼슬을 하여

신라와 당나아롸의 외교 교섭시 막후 교섭을 이끌어 내는 외교관 역할을 했다.

 

 

 

 

 

 

그의 조율에 의해 나당연합군이 구성되었으며 소정방과 함께 파견디어 기벌포에 상륙하여

백제군을 물리쳤다. 백제 패망후에는 고구려와의 전쟁에서도 막후교섭차 겸 장군으로 활약하였다. 삼국이 통일되자 통일신라에서는 당나라군을 몰아내기 위한 항쟁이 시작되었는데

이때 화가 난 당나라 고종이 신라 문무왕의 왕직을 박탈하고 김인문을 신라왕으로 봉하기도 하였다.

 

 

 

김인문은 말년에 당나라에서 살다가 효소왕 3년(694년)에 당나라에서 세상을 떠났다.

효소왕은 그의 죽음을 크게 슬퍼하며 태대각간의 벼슬을 추층하고 서악에서

장례식을 치렀다,

1931년 서악서원 부근에서 김인문 묘의 비석조각이 발견되어 현재의 능이 김인문의 무덤임이 확인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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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춘추와 김유신

 

 

 

 

 

 

신라 제29대 왕인 무열왕의 이름은 김춘추이며 비는 문명황후 문희다.

어느날 김유신의 첫쨰 여동생 보희가 서악산에 올라 소변을 누는 꿈을 꿨다.

소변이 서울에 가득 차는 꿈에 이상한 생각이 든 보희는 문희에게

꿈이야기를 했다. 언니의 꿈이야기가 재미있었는지 문희가 말했다.

보희의 제안에 문희는 승낙하고는 비단치마와 언니의 꿈을 바꿨다.

 

 

 

 

 

10여일이 지난 어느날 김유신은 김춘추와 함께 집앞에서 공놀이를 하고 있었다.

그러다 김유신이 일부러 김춘추의 저고리를 밟아 옷고름이 떨어졌다.

김유신은 보희를 불러 바느질을 시켰지만 보희는 얼굴을 모르는

남자는 만날수 없다며 바느질을 거절했다.

그러다 김유신이 일부러 김춘추의 저고리를 밟아 옷고름이 떨어졌다.

그제서야 김유신의 마음을 알아 챈 김춘추는 문희와 은은한 눈빛을 주고 받더니

사귀는 사이가 되었다.

그일이 있은 직후 김춘추는 김유신의 집을 자주 찾았는데 마침내 문희가 임신을 하였다.

이 사실을 안 김유신이 동생 문희를 불러 크게 꾸짖었다.

 

 

 

 

 

 

 

 

어느날 선덕여왕이 남산에 소풍을 간다는 소식을 들은 김유신이 마당 한가운데에 장작을

가득 쌓고 불을 질렀다

그 연기가 선덕여오아의 눈에 들어왔다. 선덕여왕은 김춘추에게 말했다.

"춘추공의 낯빛이  변하는 걸보니 예사일 은 아닌 것 같소. 춘추공은 속히 이곳을 떠나

해결책을 찾아보는 것이 어떻겠소?"

김춘추는 서둘러 김유신의 집을 찾았다.

장작더미에서 문희를 구출한 김춘추는 그녀와 정식으로 혼혜식을 올렸다,

 

 

 

 

 

 

후에 김춘추가 왕위에 오르니 바로 태종무열왕이다.

왕비가 된 문희는 많은 자녀를 낳았는데 법민, 인문, 문왕, 노차, 지경,

개원이 그녀의 소생이다.

문희가 언니에게 산 꿈이 마침내 이루어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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